‘그래서 공주와 왕자는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구예주 작가의 그림을 보면 어릴 적 보던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래된 이야기 속 인물들의 행복, 슬픔, 설렘, 환희 등이 수채화처럼 편안한 한 폭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술학원 원장님이라는 제법 안정적인 직업 대신 평생 그림 그리는 삶을 선택하게 된 것도 한 권의 동화책으로부터 시작된 결과였으니, 그녀와 동화책은 어쩌면 운명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뿐이라는 그녀는 오늘도 성실하게 책을 읽고 또 붓을 든다.

Q.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 동화책을 즐겨 읽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부터 동화책 보는 것을 정말 좋아했어요. 저희 집의 전통처럼 이어진 이벤트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아빠와 서점에 가서 원하는 책을 한 권씩 골라오는 거였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에 가던 길과 한 손에 책을 들고 집으로 가볍게 내달리던 발걸음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의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세계명작동화 전집이에요. 지금 봐도 아름다운 그림들이 가득했죠. 글을 읽고 그림을 보기를 수없이 반복할 만큼 좋아했던 책들입니 다. 오래된 책을 많이 정리했지만 그 전집만큼은 버릴 수가 없어서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책의 그림들이 제가 그림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동화책의 그림과도 많이 닮아 있네요.

Q. 그때도 그림을 즐겨 그리셨나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몇 가지 일화가 생각납니다. 평소에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어느 날, 거실 벽면 가득히 커다란 개미 3마리를 그리는 사고를 쳤어요. 그것도 빨간 크레파스로 말이죠. 의자를 오르내리며 한참을 거대한 드로잉에 심취해 있는데 엄마가 돌아오셨어요. 의외로 엄마는 저를 혼내지 않으셨죠. "와, 어쩌면 개미 앞다리를 이렇게 멋지게 그렸어? 하고 칭찬해 주시던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그리고 유치원 때, 친구들과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었어요. 수업 마지막 날에 선생님께서 '이 아이는 재능이 있으니 나 중에 미술을 시켜보라' 는 쪽지를 엄마에게 보내셨습니 다. 그 후로 부모님께서 계속 저의 재능을 지켜보셨고, 그림을 그리며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구예주 작가가 운영했던 미술학원

Q. 서양화를 전공했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서양화를 전공했던 것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전공 수업보다 그 후에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는 게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그때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네에 작은 미술 학원을 차렸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귀엽고 아늑한 공간이었습니다. 일이 적성에 잘 맞아서 월요일이 기다려질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보냈는데 우연히 보게 된 동화책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오래된 마더구스 원서 동화였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마음속에 스위치가 켜진 기분이었어요. 그 후로 동화와 그림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에 대한 꿈이 커졌습니다. 아끼던 미술 학원을 정리할 정도로 말이죠.